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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묵상

2014년 7월 10일 목요일[연중 제14주간]

by 추산봉 2014. 7. 10.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원초적 사람, 즉 아담과 하와가 알몸으로 지내던 시절 세상은 있는데로 맞물려 잘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정신에 뱀으로 불리는 어떤 자극이 가해져 평형이 깨졌다.

그 뒤로 사람끼리 죽이고 속이고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는  행위가 발생하였다.

그들은, 즉  현대인의 선조인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주님은 벌도 주고 얼르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침내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세상이 평형을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것도 극적인 방법으로...

그 뒤로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길지 않은 시간일지는 모르나 인간에게는 오랜 시간으로 생각되는 시간동안 인간들은 엎치락 뒤치락 선과 악과 선악이 혼재된 세상을 살아왔다. 

이것이 내가 아는 그리스도적 인간의 역사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상황이 인간의 역사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길이기를 기도드린다.

근본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종교인들의 횡포,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자의적 해석과 삶 가운데에 영문도 모르는체 이 세상에 놓여져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안에서 희망을 찾기를 기도드린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표현대로 소박하게 먹고 사는 사람들이 주님의 품안으로 안길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의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기를 기도드린다. 


주님 오늘 저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책 속 미술관]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과 하와’ 
(동판화. 25×19cm)
세상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회화적 이미지로 기록하려 부단히 노력한 화가, 그 아름다움과 조화를 하느님의 창조 자체로 해석한 화가,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조화를 하느님 세상의 원형으로 세심하게 새긴 화가가 있다. 역사적으로 독일 르네상스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er. 1471-1528년)가 바로 그 사람이다.
뒤러는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독일의 뉘른베르크 출신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며 미술이론가이다. 뉘른베르크는 르네상스 기운이 생동하는 문화도시였기에, 뒤러는 일찍이 새로운 지적 · 문화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는 에라스무스 등의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더 성숙한 지성과 예술의 기량을 닦게 된다. 특히 금은세공인이었던 아버지의 재력을 뒷받침으로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유학하여 새로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예술정신을 독일에 전수하기도 하였다.
그는 남다른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화가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부패와 신앙의 우민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루터의 복음운동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성직자들의 횡포, 복음을 외면한 성상과 성유물 공경,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 등을 통해 나타난 교회의 허세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신앙 원칙주의에 입각한 교회의 쇄신과 개혁이라는 그가 이해한 시대적 소명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 바로 성경의 처음이며 신앙의 원천인 창세기의 일화 ‘아담과 하와’이다.
그러나 뒤러는 이 작품을 통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깨끗하고 순결한 인간의 이미지, 그 지고지순한 창조물의 이미지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원하신 선의 세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금하신 타락의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을 묘사하였다.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금지된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는 나약한 인간의 헛된 욕망 때문에 천국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야 하는 타락의 운명, 모든 인간이 짊어진 그 원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창세 3,22-23).
 
이처럼 원죄는 아담과 하와의 잘못으로 세상에 왔고 카인과 아벨에게 유전되었으며 그 후손들 모두 죽어야 할 운명,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근본적인 죄에 처해진 것을 말한다. 그리고 죽음을 전제로 한 삶 속에서 남자는 땅 위에서 힘든 노동에 시달리고, 여인은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형벌을 받은 것이다.
 
그림을 보면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누드다. 여전히 중세의 분위기에 싸였던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이미지이다. 미술사상 누드는 부끄러움과 감춤이 없는 인간의 모습,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원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헬레니즘의 조각 작품 대부분이 누드로 제작된 것 역시 인간 아름다움의 원형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부단한 노력과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뒤러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인간이 죄를 짓기 전, 또는 이미 때와 먼지에 절어 있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결국 돌아가야 할 하느님의 세상을 아름다운 누드로 표현한 것이다.
뒤러는 하느님 세계의 완전함을 드러내고자 수학과 기하학적 고안을 하며 고도의 관찰력과 묘사력을 동원하게 되는데, 그리스 조각에서 시도되어 로마의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가 정립한 인체의 수학이론인 황금비례가 그것이다. 이 그림에서 두 남녀의 다리 길이는 신장의 1/2이며, 얼굴 길이는 신장의 1/10, 발 길이는 다리의 1/7 정도이다. 상반신의 반은 젖꼭지이며, 하반신의 반은 무릎이다. 이처럼 뒤러는 비트루비우스의 수학적 비례를 적용하여 인체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바로 하느님 세계의 아름다움과 그 완전함을 그린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뒤러가 보인 남녀는 바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당신의 모습이며, 그 모습은 필연적으로 절대적 이상미이다.
 
이 화면을 채우는 세세한 이미지를 보자. 우선 동물들의 이미지가 눈에 들어온다. 땅바닥에 있는 네 종류의 동물을 보면, ‘우울질’ 곧 음침함과 인색함을 상징하는 사슴과 ‘점액질’로 나태함을 나타내는 소, ‘다혈질’이기에 명랑함과 함께 관능성을 나타내는 토끼, ‘담즙질’이라 잔악하고 격앙된 감정을 나타내는 고양이가 있다. 뒤러에게 네 마리의 동물로 표현된 이 각각의 성향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이 결국 신앙을 저버리는 굴레이며, 이 성향들의 조화가 올바른 믿음을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품성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보면, 하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그녀는 선악과 열매가 가득 달린 나무 앞에 있는데, 이미 한 입 베어 문 열매를 왼손에 들고는 아담이 알지 못하게 뒤로 감추고 있다. 이렇게 선악을 이미 알게 된, 낙원 밖의 존재가 되었음을 나타내려는 것인지 그녀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세속성을 보인다. 그녀는 뱀과 공조하여 금단의 열매를 오른손으로 아담에게 권하고 있다. 이들 둘의 포즈를 보면, 열매를 권하는 하와의 모습은 당당하기 그지없으나 아담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다. 악의 부끄러움인가? 그러나 아담은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듯하지만, 함부로 열매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보이며, 눈빛 역시 하와를 직시하고 질책하는 듯하다. 악에 대한 선의 저항이 아니겠는가?
 
이 그림 속에는 악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메시지도 있다. 바로 고양이 앞의 쥐가 그것이다. 아담이 아직 열매를 받지 않았기에 쥐와 고양이라는 천적이 공존하는 낙원의 모습이지만, 다르게는 고양이가 아직 쥐를 알아채기 이전의 위험성이다. 그림 오른편의 낭떠러지에 홀로 위태롭게 서있는 산양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양의 원래 의미가 성경이며 예수이기에 이 형상은 종교의 위태로움을 암시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타락의 위험성 앞에서 아담이 오른손으로 꽉 잡고 있는 나무가 있다. 지혜의 상징인 앵무새가 앉아있는 것으로 보아 생명의 나무이며, 아담의 손은 악의 나락으로 떨어지면 안 된다는 강한 신앙심의 표현이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4).
생명의 원천을 지혜로 간주하여 작가들은 흔히 생명의 나무와 앵무새를 연관시키곤 했다. 뒤러는 자신이 선악과가 아닌 생명의 나무에 스스로를 맡길 줄 아는 신앙의 자부심을 나타내려는 것인지, 앵무새가 앉은 가지 아래 ‘ALBERTUS DURER NORICUS FACIEBAT 1504’ 곧 ‘1504년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가 새기다.’라는 글귀가 적힌 패널을 또렷하게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 패널을 이정표 삼아 신앙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 같다.

세속을 사는 인간에게 이 세상은 믿음의 적인 수많은 유혹의 위험으로 가득하다. 영원한 생명의 길도 있고,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죽음의 구렁텅이도 있다. 과연 선택의 힘은 무엇일까? 뒤러는 이 작은 그림을 통해 점차 나약해져 가는 우리의 심성과 신앙에 강한 질책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길처럼 생겼다고 해서 모두가 길은 아니다. 우리가 왔던 원래의 길을 찾고, 그 참된 길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이 신앙의 길임을 뒤러는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문학박사. 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 미술비평가.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d/durer/2/13/2/0421.jpg]



[성화에 담긴 영성]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아담과 하와  (Adam and Eve, 1507) 
Oil on panel, 209 X 81cm

지영현 신부 (가톨릭회관 평화화랑 담당) 
 
뒤러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베어 먹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알몸임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성경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그림에서 아담과 하와는 따로 각각의 공간을 차지합니다. 지아비와 지어미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은 두 사람이 나누는 시선과 손에 들린 선악과뿐입니다. 이들은 인식의 열매를 베어 먹고 눈이 열려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신성의 위험한 영역에 첫발을 들인 것입니다. 갑자기 밝아진 눈은 부끄러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알몸 말고는 모든 것을 보고 누렸던 인간의 행복한 눈이, 알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배경에는 짙은 장막이 드리웠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배경에서 밝게 빛나는 인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구약적 예형입니다. 그들이 묶은 것을 이들이 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의 원형을 이들이 속량했기 때문입니다. 어깨선이 아름다운 하와는 눈부신 허벅지를 교차시키면서 뒤에서 앞으로 걸어 나옵니다. 결단의 행동입니다. 선악과 선택에도 주저함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머리카락이 바람 없이 휘날립니다.  여자의 행동을 지켜보던 아담도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끄럽게 만납니다. 신의 당부를 깨뜨리는 아담의 인간적 의혹과 망설임이 보입니다. 걸음걸이가 좌우로 주춤거립니다. 뒤로 젖힌 그의 오른손에는 억제할 수 없는 유혹에 기울어지는 마음과 내키지 않는 거부의 심정이 고통스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죄를 지어 처하게 된, 깊이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짙은 어두움 그 자체에서 밝은 빛이 비쳐옵니다. 아담과 하와를 눈부시게 비추는 그 빛은 죄 지은 인간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둘은 죄를 짓고 낙원으로부터 쫓겨나지만 하느님의 마음은 그들 곁에 함께 계십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1월호]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d/durer/1/06/1adameve.jpg)

[교회미술 산책] 천국에 있는 아담과 이브

1455년경, ‘세상의 일곱 시대 책’(Livre des sept ages du monde), 몽스에서 제작, 44×30cm, 종이에 채색, 브뤼셀 알베르 1세 왕립도서관, 벨기에
 
프랑스 아미엥에서 활동한 수사본의 대가 ‘시몬 마르미옹’(Simon Marmion, ±1425-1489)이 그린 수사본이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이 세상에 대한 묵상으로 유도하는 이 수사본은 환상적인 에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해질 무렵 수평선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이곳은 백조, 사자, 사슴, 토끼, 새 등 모든 생물과 인간이 평화로이 행복하게 어우러져 사는 ‘에덴의 동산’이다. 물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백조와 물을 마시는 사슴의 우아한 자태가 한가롭다. 사슴 바로 뒤에 있는 사자 역시 사슴을 공격할 태세가 아니라 여유로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아담과 이브 위로는 이 세상을 평화로이 다스리는 하느님이 황금 옥좌에 앉아 지상에 축복을 내리신다. 그를 둘러싼 노랑, 오렌지, 푸른색의 눈부신 공간에는 천사들의 모습이, 그리고 그 주위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하지만 아담의 손에 들린 ‘선악과’(善惡果)는 앞으로 일어날 비극, 즉 ‘에덴에서의 추방’을 암시해주고 있다. 신년을 맞이하여 태초의 평화로웠던 에덴동산을 꿈꾼다. 

[2014년 1월 19일 연중 제2주일 청주주보 3면, 작품해설 박혜원 소피아]



[성화 해설] 천지창조 - 아담의 창조
Michelangelo Buonarroti, 프레스코 1511, 시스티나 경당, 바티칸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가치가 드러나는 매우 위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이 맺는 그 넓고도 깊은 친밀함이 드러난다(지영현 시몬 신부,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m/michelan/3sistina/1genesis/6adam/06_3ce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