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한때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바로로가 사도가 되어 도리어 자신이 핍박을 받는 신세가 되엇다.
이는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굳세게 해 주시고 빛으로 눈을 가라고 빛으로 눈을 뜨게 해 주셨다.
그러니 나도 견진성사를 통하여 굳셈을 받았으니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하겠다.
하지만 부끄럽기 짝이 없게도 여전히 내 눈은 흐리고 정신은 흐뜨려지기 일쑤이다.
리더가 되라고 부름을 받았지만 우유부단과 어리석음으로 사명을 완수하기는 커녕 헤매고 있다.
때로는 더러운 나의 육신과 정신을 정화시켜주십사하고 청하여 보나 쉽지는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손쉽게 정화되리라고 생각하는 내가 또한 어리석은것 아닐까? 내마음과 손과 발과 눈이 죄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기도하지만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묵묵히 들어주시기만 한다. 그래서 차라리 내마음과 손과 발과 눈을 없애버리는 것보다는 주님께서 자비롤 베푸시오 바오로사도와도 같이 정화시켜주시고 선한 일을 하도록, 선한곳에 가도록, 선한것만 보도록 해 주십사 기도해야 하겠다.
주님 오늘 저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선함으로,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터키] 이스탄불 주교좌 성령 성당 성 요한 금구 성해함
주호식(jpatrick) 신부님
터키 이스탄불 교구의 주교좌인 성령 성당 제대 위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金口) 성해함 모습입니다. 2009년 3월 바오로의 해를 맞아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과 평화방송 평화신문이 함께한 그리스 터키 제2차 크루즈 성지순례 때 찍은 사진입니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그리스어: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 이오아니스 오 흐리소스토모스[*],
349년경 – 407년)또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초대 교회(고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설전을 펼쳤다.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그의 아내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에 의해 박해를 받고 유배를 당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황금의 입을 가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성공회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으며, 축일은 각각 9월 13일과 11월 13일이다. 대한성공회에서 사용하는《성공회 기도서》의 저녁기도(만도)에도 성 크리소스톰의 기도[1]가 포함되어 있다.
Subject: Portrait of Saint John Chrysostom of Antioch (Hagios Ioannis Chrysostomos). An early Byzantine mosaic from the Cathedral of Hagia Sophia in Constantinople (modern Istanbul). The mosaic is approximately 1,000 years old.
Source: [1] ([2]. Image has been cropped.)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교부
출생 349년, 안티오키아
사망 407년 9월 14일, 폰투스 코마나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오리엔탈 정교회
축일 동방 교회
11월 13일
서방 교회
9월 13일
수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육, 간질, 강사, 웅변가, 설교자
초기 생애[편집]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349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마 군단의 장교였고 그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 밑에서 양육되었다. 법학과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신학도 함께 공부했으나 결국 기독교에 헌신하기로 하고 은둔 수사가 되어 성서를 공부하였다.
지나치게 공부를 많이 한 탓에 건강이 나빠지자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그는 381년 멜레티우스주교에 의해 부제서품을 받았고 곧이어 386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12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387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즉위 10주년을 맞아 안티오키아에 특별세가 부과되자, 시민들이 납세거부 투쟁을 일으켰는데 시민들은 테오도시우스와 그 가족의 석상을 부수고 공중목욕탕을 파괴하였다. 이 때의 납세거부 투쟁은 요한네스의 부추김을 받은 것이었는데, 결국 안티오키아 당국의 과잉 진압으로 참혹한 학살극으로 끝나는 결과를 낳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편집]398년 요한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추대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다운 특유의 명쾌한 설교와 강의로 그 곳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권력자와 부자들의 사치와 인색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설교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적도 많이 만들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동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황후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였다. 에우독시아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행실로 크리소스토무스 대주교에게 공공연하게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크리소스토무스 대주교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청빈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그의 감독을 받는 사제, 수녀,수사들은 모두 독신생활을 해야 하였다.
이러한 강직하고 까다로운 성격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인 테오필루스와도 불화를 일으켰다. 403년 테오필루스는 오크 회의에서 요한네스와 설전을 벌였다. 회의에서 그는 여러가지 죄목으로 요한네스를 기소하였는데, 정작 요한네스가 출두하지 않자 그를 단죄한 뒤 대주교직에서 면직시켜 버렸다. 이를 기회로 유독시아는 남편 아르카디우스를 부추겨 그를 비티니아로 유배시켰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요한네스 대주교가 유배되자 폭동을 일으켰고, 테오필루스의 지지자들과 충돌했다. 그 날 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에우독시아가 유산을 하자 황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후 에우독시아의 은상(銀像)을 둘러싸고 다시 황후와 요한네스 대주교는 대립했고 결국 다음 해에 벌어진 종교회의에서 요한네스 대주교는 다시 추방당했다.
대주교는 유배를 떠나기 직전,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교황은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이 사태에 개입을 시도했다. 호노리우스와 교황은 아르카디우스를 압박하여 크리스소토무스 대주교를 돕고자 하였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응하지 않았다. 406년 서방 황제와 교황은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들을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감금한 후 이탈리아로 다시 돌려보냈다.
407년 가을, 요한네스는 소아시아 폰투스의 외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교회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그가 죽은 뒤 약 31년 후인 438년 요한네스는 공식적으로 명예 회복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당시 동로마 황제이자 유독시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엄숙히 장례를 치루어주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제4차 십자군 세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약탈을 벌일 때 그의 유해는 십자군에 의해 파헤쳐져 로마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800년 후인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요한네스의 유해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이장되었다.
현재 전승되는 크리스토무스 대주교의 설교를 보면,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거든, 그것을 남들과 나누라거나,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는 설교처럼 부자들의 인색함과 사치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매일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년 9월 15일 주일[연중 제24주일] (0) | 2013.09.15 |
---|---|
2013년 9월 14일 토요일[성 십자가 현양 축일] (0) | 2013.09.14 |
2013년 9월 12일 목요일[연중 제23주간] (0) | 2013.09.13 |
2013년 9월 11일 수요일[연중 제23주간] (0) | 2013.09.11 |
2013년 9월 10일 화요일[(연중 제23주간] (0) | 2013.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