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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산봉에 관하여

南道 정자기행(590)-고창 고수면編

by 추산봉 2015. 12. 14.

http://hankukmail.com/newshome/print_paper.php?number=20611

 

뉴스일자: 2013년07월25일 20시45분

전북전래지명총람에 나타난 고창 지역의 누정은 고창읍(19개소), 고수면(15개소), 성송면(13개소), 대산면(5개소)의 정자에 대한 자료가 발표됐다. 29일에는 공음면(2개소), 아산면(16개소), 신림면(5개소), 성내면(5개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흔적을 찾는다. 우선 고수면의 정자는 효를 위한 정자가 대부분이다. 또 이러한 정자를 유지해 告諸往而知來, 즉 지나간 일을 이야기함으로써 앞으로 올 일을 알아 차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 고수면은 고사면(古沙面)과 수곡면(水谷面)에서 ‘고(古)’자와 ‘수(水)’자를 따 고수면(高水面)이 되었다.

쌍괴정(雙槐亭)은 영광 쪽으로 가면 문수사 입구가 나오는데 이곳을 지난 영광쪽으로 조금가면 좌측에 희구정이 나오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장두리 마을 앞에 괴목나무 두 그루를 모정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장두리에 마을을 싱징하는 고목사이 끼어 있으며 정자상태는 양호하다. 개항기 때의 정자로 1867년에 밀양박씨 처사(処士) 박승현(朴升鉉)이 세운 정자이다.

이 고목은 박승현(朴升鉉)이 열한 살 때 마을 앞에 심었는데 나무가 번성하여 녹음이 우거지자 박승현의 손자 박양휴(朴陽休)가 그곳에 정자를 세웠다고 전한다.

괴목나무 아래에 있는 쌍괴정은 나지막한 기단에 둥근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정면 2칸, 측면 1칸의 정자이다. 팔작지붕은 초익공 홑처마로 간결하게 중수했다. 

정자 안에는 역사를 말해주는 「쌍괴정기(雙槐亭記)」가 걸려 있고, ‘쌍괴정(雙槐亭)’이란 편액이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의 글씨로 고색창연하게 걸려 있어 운치를 더한다


희구정(喜懼亭)

밀양인(密陽人) 양오((陽梧) ) 박서봉((朴瑞鳳))이 조선 성종 때에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재직하다가 노친(老親))을 모시기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밀양으로 돌아갔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 ) 때에 화를 피하려고 고창 고수면 산양동((山陽洞)으로 들어와 살며 추산(山) 아래에 손수 지은 정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퇴락하자, 후손이 1989년 년 3월에 현재의  장두마을 입구로 옮겨 위치하며 박서봉이 지은 희구당기(喜懼堂記)와 신사정이 지은 희구정중건기가 걸려 있다. 

희구당(喜懼堂)은 박협(朴悏/1610년/광해2) 의 호이다.그의 후손 박서봉이 1989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중건했다.

희구정이 축운에서는 
....난간에 좋은 달을 맞으니 방장산이 높고, 창에 맑은 바람이 들어오니 인천의 물이 밝다.
덕음을 손자에게 끼치니 집에 좋은 운이 열었고,효심으로 할아버지 일을 짓는 데는 성심으로 다하였네.....

포상정(浦上亭)은 희구당이 있는 길 맞은편 초내리 칠암마을 뒷산에 오재균 형제들이 담락했던 정자이다. 암자와 같이 있어서 탑 등이 보이고 1943년에 지었다.

추산( ( 山) 중턱에 있는데 함양인(咸陽人) 오재균(吳栽均)이 세웠다. . 정자는 대나무 숲속의 낮은 절벽 앞에 깊이 숨겨진 듯이 자리잡고 있다. . 예전에는 절터로서 정자 옆에 탑과 보살상이 각각 1기씩 있었다. . 또한 절이 한 채 있는데, 절이었을 때에는 고시(考試)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기식(寄食)하며 지냈다고 하나, ,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만회당(晩悔堂)은 황산리 황산마을 입구 모퉁이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1902년 죽산인 안영선(安暎善 1824~1903)이 처음지은 정자다. 이곳은 그의 만년을 자연을 벗삼아 학문과 휴식을 겸하기 위한 휴식공간이다. 

만회(晩悔), 즉 늦은 후회라는 정이름은 후손 동열이 지은 만회정운에서 "산수에 점쳐 살고 있으니 지와 인을 겸하고, 늦게 경류을 쌓으니 참다움에 기뻐하네(占居山水지兼仁 晩築經綸却怡眞)"라고 한 것에서 의미를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그의 가옥 오리감나무 옆에 공부방과 대청을 초가로 세웠다 한다. 세월이 흘러 훼손되었던 것을 1950년 후손들이 다시 황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 망북단(望北檀)에 기와로 정자를 지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져 찾는 사람이 드물고 관리가 힘들어 지금의 자리인 풍암정 보다 한단 아래에 대청마루 2칸과 기와지붕으로 1989년 이건했다.

풍암정(豊嵓亭)은 죽산인 무송당(撫松堂) 안군필(安君弼) 의 후손들이 세웠다. 건립 연대는 1864년이며, 형식은 팔각정 형태의 홑처마다. 

두리기둥을 팔각으로 세우고 겹도리 홑처마로 비교적 간결하다. 마루 가장자리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중앙에 사각으로 1칸짜리 방을 만들었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낮은 문턱만 형식상 남아 있다.

풍암정(豊嵓亭)이 있는 자리는 이 마을을 다니면서 정자를 볼수 밖에 없는 곡진 부분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래로는 3층의 돌층계가 있고, 풍암정은 맨 위층에 서남간을 바라보고 건립되어 있다. 주변에는 많은 나무들로 숲을 이루고 있어 휴식처로서는 그만이다. 만회당(晩悔堂)과 위아래로 자리하고 있다.

오괴정(五槐亭)은 고수면 예지마을 뒤편 육모정으로 작은 연못을 앞에두고 화강암반 위에 올려져 있다. 그러아 주변의 관리 소홀로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지금도 주변 어른들이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죽산안씨들에 의해 세워진 정자에는 기문과 시판으로 가득하다. 

다섯 그루 느티나무라는 의미의 오괴정 주변에는 노거수 4그루가 있다. 마을에서는 이 노거수들을 당산나무로 인식한다. 

노거수 바로 옆에는 입석 1기가 세워져 있다. 정자 아래에는 연못이 있어, 지금도 연꽃을 볼 수가 있다. 

죽산안씨 사람들에 따르면, “정자가 있는 암반의 모습이 거북을 닮았고 거북이가 연못의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거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거북의 머리 부분에 정자를 지었으니, 바로 오괴정이다.”라고 전했다. 

정자 아래 연못이 있었던 방향의 암반에는 ‘일감당(一監塘)’이라는 글자가 음각돼 있다. 정자가 세워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이라고 하니, 1,700년대로 보면 될 것이다. 정자 옆에는 특이하게 마을인들의 작은 모정과 같은 정자가 하나 더 있다.  

예지마을에는 고종 때 학자 죽정(竹亭) 이봉령(李鳳齡)이 글을 가르친 사물재(四勿齋)와 진주강씨(晋州姜氏) 강익의 재실인 효사재(孝思齋), 이지영(李祉榮)의 효를 기린 정려(旌閭), 이공우(李孔雨)가 지은 정자 세한정(歲寒亭)이 있다. 

세한정(歳寒亭)은 1824년 예지리 마을 중심부에 위치하며 정면 5칸에  측면 2칸으로 정자 앞 좌측편에 작은 연못을 두었으며 규모가 상당히 크다. 

구한말 대편수 유익서가 지었으며 세한정기(歲寒亭記)는 정인보(鄭寅普), 기문은 소석(小石) 이종문(李種文)과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 1893(고종 20)∼1970)이 지었으며 현판은 석전(石田) 황욱(黃旭1898~1993)이 썼다. 고창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출신의 서예가로 한학(漢學)과 예(禮) .악(樂).사(射) ·어(御) .서(書) .수(數) 등 선비가 닦아야 할 육예를 고루 갖춘 인물이다.

지촌마을 뒷산 정상에 백제 때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진주강씨 강담과 강욱의 재실인 강수재(講修齋)가 있다. 예지리에는 서해안고속도로와 고창담양고속도로가 만나는 고창분기점이 있다

금계정(錦溪亭)은 남산리 잠곡마을 입구 도로변 산 능성이에 멋스러운 노송을 앞으로 두고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1912년 이천인 금계(錦溪) 서양철(徐良喆)이 지었으며 자연을 벗삼아 시문을 즐겨 그를 돈세처사(遯世處士)라고 불렀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기문을 지었다. 정자를 출입하는 곳을 찾지 힘들고 너무 허술해 금방이라고 쓸어 질 태세이다.

그러나 주변의 소나무들은 한폭의 그림 같은 모습이다. 이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살면서 학문을 탐구하였다.

기문에서도 "정자아래 맑은 시내가 있으니 씻을 수 있어서 금계위에 정자이름을 구했네"라고 적혀 있다. 정자앞으로 흐르는 물길이 있어 예전에는 멋을 더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기서강학당(金麒瑞講學堂) 상평리에 자리하고 있는 김기서 강학당 기묘사화 직후에 낙향한 김기서가 후진을 양성할 뜻을 펼치기 위해 1548년(명종 3)에 세웠다. 누정의 기문과 시문 등이 문전에 많이 남아 있다.

전불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강학당은 조선초기의 문신인 김기서가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두문사제하면서 그의 선친묘역에 시묘막을 짓고 거처를 정하고 이와 함께 후학강론을 펼치기 위해 지어진 학당이 있다. 

돈목재(敦睦齋) 김기서(金麒瑞)는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14년(1517)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 신진사림들이 대거 숙청당하자 이곳에서 두문불출하고 후진양성에 뜻을 품고 이곳 전불사로 들어와 본 강학당을 짓고 후진양성을 위해 온갖 정열을 기울였다. 


이 밖에 고수면의 정자는 수남정(水南亭 1935년). 용강정사(龍岡精舎).운림정(1900년경 雲林亭).문향정(聞香亭 1935년 초내리 초내마을)망향정(望鄕亭 봉산리 봉산마을1876).학정(鶴亭 1820년) 등이 있다. 고사면 와촌리(瓦村里)·황산리(黃山里)·상평리(上平里)·두평리(斗坪里)·은사리(隱士里)와 수곡면의 부곡리(芙谷里)·장두리(長斗里)·초내리(草乃里)·평지리(平支里)가 합쳐져 9개 리가 있는 고수면이 되었다.

도시민들에게는 다소는 이질적인 목조건물, 그러나 고추부서(孤雛腐鼠), 외로운 병아리나 썩은 쥐민큼이나 업신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여유로운 삶에는 이들 정자들의 어른들의 가름침이나 정신의 근간했음을 잊어서는 않된다. 
문화.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