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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산봉에 관하여

(펌) 산양동에 이런 일이

by 추산봉 2012. 2. 15.

http://user.chol.com/~park56eh/yeongsan/yeongsan-jjk-02.htm

 

■양고살재 유래
고창읍에서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과 연결되는 국가지원 지방도 15호 선상,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양고살재가 있다.

 

양고살재는 병자호란때 고창 출신 박의장군이 누루하치의 사위인 적장양고리(陽古利)를 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의(朴義)는 1599년(선조 32년) 고창군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서 고창 입향조인 관찰사 양오공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용기가 대단하고 말을 잘 타며 총을 잘 쏘아 박포수라 불렀다. 1624년(인조2년) 무과에 급제하고 부장(部將)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서울이 함락당하고 임금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수모를 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근위병을 거느리고 수원근교 광교산에서 적을 만나 싸워 여러번 이기기는 하였으나 갑자기 내린 폭설을 만나 양군이 격전을 벌인 끝에 아군이 패하게 되었다.

 

박의는 적군의 이동로인 방장산입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자 적의 대장을 초탄에 명중시켜 쓰러뜨렸다. 죽은 적의 상장은 양고리라는 만주 정황기인으로 누루하치의 사위로서 창평전투에서 58회나 승리하여 청태종의 총애를 받던 명장이었다. 이때에 예친왕 다락을 따라 왔다가 박의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청나라 사기에서 보듯 청태종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통곡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무훈왕을 봉하였다 한다. 양고리가 죽은 뒤에 산에서 조급히 몸을 피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고 청군이 저 사람이 양부마를 쏜 사람이라 하니 활을 잘 쏘는 애륵을 시켜 잡아 목을 바치었다 고 한다. 박의의 묘소는 고수면 예지리 양정에 있으며 후손은 고수면 장두리와 아산면 중월리등에 살고 있다.
-자료인용(고창코리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