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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

신문팔이 월남 소년, 60년 뒤 한국건축계의 거목되다

by 추산봉 2013. 7. 2.

http://kecstory.tistory.com/565

 

신문팔이 월남 소년, 60년 뒤 한국건축계의 거목되다

S&T Playground/Platform Talk 2013/06/25 15:31 |

 

[엔지니어열전⑦]김정식 목천문화재단 이사장, "공학자들이여, 야생초가 되어라"
한국전쟁 전 가족들과 월남…신문‧껌팔이 해서 중학교 입학금 마련
수학 좋아해 전기과 진학했다 형 어깨 너머로 본 건축에 매료
형제 건축가 '정림건축' 설립…금융·산업분야 대형설계프로젝트로 두각
건축에 조직설계와 컴퓨터 최초 도입…독특한 직원 교육제도로 '정림건축사관학교' 별칭
인천공항·청와대본관·국립중앙과학관 등 2000여개 설계 프로젝트 진행
현재 친환경 건축, 건축아카이브 구축 등으로 공헌 목표

 

 

종종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죠. ‘야생초가 되어라’.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고생을 통해 자립정신을 키우는 것은 아주 값진 일입니다. 나는 중학교 2~3학년의 나이에 ‘내가 살려면 공부밖에 도리가 없구나’를 깨달았는데, 아직도 그 교훈을 굉장히 소중히 여깁니다. 난 아버지가 가난했던 것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국 경제 성장기 초기부터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해온 건축가 김정식 목천문화재단 이사장은 한국 현대건축계의 대부(代父)이자 원로 중 하나다. 1967년 국내 대표 설계사무소인 ‘정림건축’을 세워 수 십 년을 건축계 일선에서 활동했다. 외환은행 본관, 청와대 본관과 춘추관, 인천국제공항,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등 그가 작업한 굵직한 건축물만 열거해도 우리나라 현대사가 보일 정도다.

 

그의 화려한 건축 설계 경력 뒤에는 어렵고 고생했던 과거가 있다. 소년시절 일본학교를 다니며 차별 받았던 경험이며, 한국전쟁 직전 고향 평양을 떠나 삼팔선을 넘던 기억, 명동거리에서 껌과 신문을 팔아 학비를 마련했던 청소년기,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대학원을 8년 만에 졸업한 것 등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들은 그의 아름답고 세련된 건축물들과 대비되어 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

 

고학으로 건축공학을 배워 스스로의 꿈을 세운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만나봤다.

 

 

◆ 중국과 평양에서 보낸 유년시절…“어린 마음에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있었다”

 

김정식 이사장의 고향은 평양이다. 대대로 평양에 살았지만 일제치하에서 그의 가족들은 중국 다롄(大連)으로 이주해 해방직후까지 머물렀다. 그는 12살이 될 때까지 다롄에서 살았는데 당시 중국도 일제강점기여서 그는 일본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조선 학생이라고는 그 혼자.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한 기억은 없지만 담임교사의 차별은 아직까지도 사무쳐 생생하다.

 

1학년 때인 어느 날은 일본인 담임교사가 칠판에 산수 문제를 적어놓고 학생들에게 귓속말로 답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는 워낙 숫자를 좋아했던 터라 진작 문제를 풀고 열심히 손을 들었지만 교사는 모든 일본학생들이 답을 틀리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의 답을 들은 교사의 대답은, “너한테 마늘냄새가 난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날 그는 모욕감이 무엇인지 체득했다.

 

해방직전인 5학년 때는 조선인 두 명이 전학을 왔는데 그 중 한 명이 콧물을 줄줄 흘리고 행동이 어리숙해 몇몇 불량한 일본 아이들의 표적이 됐다. 그들은 직접 나서지는 않고 일부러 체격이 작은 친구들을 골라 어리숙한 조선친구를 때리게 시키는 방식으로 괴롭혔다. 보다 못한 그가 나서 주동하는 아이를 찾아갔다. “때리려면 직접 해라, 차라리 날 때리라”며 덤벼드는 그를 보고 당황한 일본아이는 분위기에 밀려 그의 귀싸대기를 쳤다. 그는 상대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종례 시간을 기다렸다가 손을 번쩍 들고 교사에게 “내선일체(內鮮一體)라며 조선을 차별하지 않는다 하고서 조선인을 이유 없이 때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결국 교사는 모든 학생들의 앞에서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을 해야 했지만 문제를 일으킨 일본학생들을 야단치지는 않았다.

 

이후 해방이 되어 평양으로 돌아가기 직전, 그는 학교로 담임교사를 찾아갔다. 평양으로 간다는 그의 말을 듣고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얼굴이 일본인 담임교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왔지만 기대와 달리 평양의 학교들은 일본학교보다 오히려 더 이상했다. 이제 겨우 십대 초반인 학생들에게도 막스와 레닌의 서적을 읽도록 했고, 종례 시간이면 자아비판을 시켰다.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지주였던 아버지의 잘못을 고발하면 교사는 칭찬하고 학우들은 박수를 쳤다. 어린 마음에 “이런 건 정말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때쯤 그는 학질에 걸려 하루 학교에 나가면 다음날 하루는 집에 누워있어야 할 만큼 몸이 약해져 학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해방이후 평양에 머문 기간은 1년 남짓. 결혼해서 사리원에 정착해 살고 있던 큰 누이를 제외한 모친과 5형제는 먼저 월남(越南)한 부친을 따라 한국전쟁 직전에 삼팔선을 넘었다. 중간에 기차 안에서 보안요원(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해 모친과 막내와 잠시 헤어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온가족이 얼마 후 재회할 수 있었다. 그는 남한으로 넘어오던 그 모든 과정을 ‘기적 중의 기적’이라 표현했다.

 

가끔 북한에 남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지금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의 종친입니다. 같은 ‘정’자 돌림을 쓰죠. 어쩌면 저도 한 자리 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보다는 말 잘못 해서 총살당했을 가능성이 더 높죠. 하하. 우리 가족은 민주주의자에 기독교인이었으니까요. 아무튼 남한으로 넘어온 건 기적입니다.”

 

◆ 고학(苦學)으로 점철된 학창시절…“오히려 학업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그의 가족이 월남을 결심했던 결정적인 계기는, 부친의 지인이 모친을 찾아와 “남한에 있는 당신 남편이 고래 같은 기와집에서 트럭 2대를 갖고 살고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월남 1년 만에 그렇게 자리 잡았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침 조부도 월남을 권했던 터라 살얼음을 밟듯 삼팔선을 넘었다.

 

하지만 막상 고생 끝에 찾아와보니 부친은 낡고 해진 미군 여름 작업복을 입고 남의 집 문간방에 얹혀살고 있었다. 반도호텔 부근 중국집에서 부친이 사주는 자장면을 먹는 내내 큰 실망감 때문에 고개를 들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부친은 곧 취직을 했지만 부친의 월급은 일곱 식구 식비만으로도 바듯한 생활비였다. 당시에는 중학교도 입학금이 있었는데 집안 사정이 학비를 대줄 형편이 안됐다. 둘째였던 그는 직접 학비도 벌고 조금이라도 살림에 도움이 되어볼까 해서 명동거리로 나서 신문팔이를 시작했다. 첫날, 호기롭게 신문 10부를 받아들곤 막상 거리로 나서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굳어버리고 말았으나, 그의 모습을 귀엽게 보는 어른들이 있어 처음으로 직접 번 돈을 들고 귀가할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는 맏형도 합류했다. 형과 그는 새벽이면 서울역에 가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노트를 팔고, 다시 명동거리 다방들을 돌며 신문과 껌을 팔았다. 얻어맞거나 쫓겨나는 일도 간혹 있었지만 그럴수록 생존의식은 더 강해졌다.

 

거리에서 신문과 껌을 팔던 소년들은 타락의 길로 빠지기가 쉬웠다. 주변에서 술과 담배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어렵게 번 돈을 주색잡기에 쓰는 소년들의 모습을 보며 그는 오히려 마음을 다잡았다. 공부하지 않으면, 또 학교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가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당시 미도파백화점에 가면 미군의 무료 영어교실이 있었다. 그는 새벽 5시 미국인 여성이 딕슨 영어교재를 놓고 진행하는 공짜수업을 하루도 빠짐없이 들었고, 신문 판돈을 차곡차곡 모아 학비를 마련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학교에 들어가니 수업 하나 하나를 허투루 들을 수 없었고, 특유의 경쟁심이 발휘되니 성적도 올랐다.

 

그는 지금도 부친의 가난이 자신에게 준 것을 생각해본다. 생존의식과 학업에 대한 열망. 역설적이게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가난이 있어 스스로 얻을 수 있었다.

 

◆ 건축으로 꿈을 세우다…“비새는 첫 사무실에 4명이 ‘정림건축’을 만들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과를 들어갔다. 지금처럼 진로상담이 체계적으로 되던 시기가 아니라 단순히 수학을 좋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응용학문 중 수학과 가장 가까운 것이 전기과 같았다. 그런데 1년을 다녀보니 생각만큼 전기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점점 수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맏형은 같은 학교 건축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집에서 형이 과제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며 흥미를 느꼈다. 트레이싱 페이퍼에 연필로 제도하는 것이나 건축물 모형을 만드는 모습이 그럴 듯해 보였던 것. 형에게 상의하니 “건축에도 여러 가지 전문분야가 있으니 내가 디자인을 하고 수학을 좋아하는 네가 구조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전과가 자유롭던 시기는 아니었지만 학과 주임 집에 하루 종일 앉아있으며 설득해서 건축학과로 옮길 수 있었다.

 

전과 후 가장 먼저 진행한 계획은 마음 맞는 친구들 넷이서 우리나라 건축사를 정립해보는 것. 일본의 고건축들은 기록이 매우 잘되어 있는 데 반해 우리나라 것은 전쟁을 많이 겪어서인지 관련 자료들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첫 작업으로 경기중학교 뒤에 위치한 봉은사를 선택했고, 측량기와 줄자 등을 가지고 여름방학 내내 매달려 실측하고 도면을 만들었다. 다음해 국전(國展: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건축이 처음 포함됐는데 봉은사 도면을 냈더니 특선에 선정됐다. 원래는 창작을 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건축 디자인이 활성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에 진학했다고 형편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고학의 그림자는 짙었다.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학비가 없어서 제때 등록을 못하는 바람에 입학 후 졸업까지 8년이나 걸렸다. 동생도 셋이나 되었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틈틈이 학교를 다녔다.

 

그중 6년은 충주비료에서 근무했다. 충주비료는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 성장의 모태가 되었던 곳으로 여러 합작회사들을 설립하는 중심에 있었다. 다른 산업이 전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당시 충주비료는 거의 국내 유일의 대기업으로 다른 곳보다 월급도 많았다. 그는 충주비료에서 행정건물과 창고, 사택 등의 건물설계를 담당했고 조직생활을 경험했다. 6년 후, 진해화학으로 와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그는 학교로 돌아가 학위를 마쳤고, 형과 의기투합해 설계사무소 창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정림건축’. 1967년 설립된 정림(正林)건축은 곧은(正) 나무(木)와 나무(木)가 만나 숲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형제가 많다는 것이 나무에 비유되는 것에서 착안해 김정식 이사장이 제의한 이름이다. 현재는 고인이 된 김중업, 김수근, 나상진 등 쟁쟁한 건축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젊은 형제건축가가 도전장을 내민 것.

 

명성으로는 비교가 안 되었지만 형제는 용감했다. 그리고 둘 다 전문분야와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동생인 김정식 이사장은 충주비료에서 6년을 일한 경험으로 산업계통의 건축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객의 요구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형인 故 김정철 대표이사는 그동안 산업은행, 한국은행, 외환은행 등에 근무하며 지점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 금융계통에 빠삭했다. 일부러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형제가 산업발전시기에 꼭 필요한 경험들을 각자 쌓아왔던 것.

 

정림건축은 울산의 한양화학 사택 등을 시작으로 금융과 산업계통의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외환은행 본점 디자인 현상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았다. 현대건축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서울시 중구 을지로의 외환은행 본점은 당시로서는 드문 15층 고층 건물이었고 규모가 굉장히 컸다. 기라성 같은 건축가 12명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고, 결국 형제건축가가 끝까지 남았다. 당시의 설계사무실은 특정 건축가를 중심으로 한 아틀리에(atelier)형식으로 소규모로 운영되었는데 큰 회사에서 조직 경험을 쌓은 형제는 구조‧전기설비‧인테리어‧조경‧시방(견적) 등 각각의 전문 파트로 나눠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조직화된 설계를 도입했다.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 외환은행 본점 설계부터 도입된 조직 설계는 정림건축의 든든한 무기가 됐고, 이후 대형 프로젝트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우리나라 현대건축사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특히 정림건축은 김정식 이사장의 혜안에 따라 1985년 국내 최초로 설계에 컴퓨터를 도입했으며, 외국산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기 위한 ‘건축상세’를 내는 등 여러 가지로 국내 건축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또 ‘정림건축사관학교’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직원교육에도 철저해 연차별 교육프로그램과 승급시 현장경험 준수 등의 기준을 정립, 능력 있는 설계 인재들을 다수 배출했다. 지금도 ‘정림건축 출신’이라고 하면 어디서든 인정을 받을 정도.

 

이러한 노력 끝에 직원 4명이 허름하고 비새는 일본 적산가옥에 차린 정림건축은 45년이 지난 현재 500명이 넘는 직원에 사우디아라비아, 뉴욕, 두바이, 베트남에 지사와 현지법인을 설립한 우리나라 대표 건축설계 전문기업이 됐다.

 

 

 

 

“형과 나는 두 살 터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엄청 많이 싸웠는데 그러면서도 뭐든지 꼭 둘이 같이 했죠. 나는 동생인데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있었고, 형은 그런 나를 잘 이해해줘서 우리는 형제이기 이전에 가장 친한 친구였죠. 함께 정림건축을 이끌어가면서도 정말 많이 싸우고 충돌했습니다. 내가 경영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형이 회사운영은 저에게 많이 맡겼는데, 디자인에 대해서는 서로 아주 팽팽했습니다. 하도 많이 싸워서 나중에는 어떻게 했냐면, 형과 내 프로젝트를 나눴어요. 의견은 나누되 결정권은 서로 나눠 갖도록 한 거죠. 하하. 함께 하기 위해 그런 방법까지 동원한 거죠.”

 

◆ 그의 손을 거쳐 간 2000여개 건축물…“창원 새마을회관, 평양과기대, 인천공항 기억에 남아”

 

이화여대 중앙도서관, MBC 여의도 사옥, 청와대 본관,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율곡기념도서관, 이화여대 박물관, 데이콤종합연구소, 청주 쌍둥이체육관,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등 그의 손을 거쳐 간 건물이 2000여개가 넘는다.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한국건축대상, 한국건축가협회상, 예총예술문화상 등도 다수 수상했다.

 

모든 건축물이 다 특별하지만 그에게도 유독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들이 있다.

 

먼저 창원의 새마을회관은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가 크게 혼쭐이 났던 건축. 벽 없이 기둥만 세워 지붕을 얹은 노천 건물로 안에서도 야외처럼 활동할 수 있도록 설계해 큰 호평을 받았는데, 어느 날 큰 태풍에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 회관 옆 운동장에 사뿐히 내려앉은 사고가 벌어졌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소문이 퍼져 여기저기서 원성을 듣게 됐다.

 

“성공적으로 완공해서 몇 년을 잘 사용하던 회관이었는데, 태풍이 직통으로 지나가며 지붕이 날아가 버린 겁니다. 막상 현장에 가서 점검해보니 시공사가 지붕과 바닥을 고정하는 앵커볼트(anchor bolt) 매립을 잘못해서 벌어진 것으로 결론이 났고, 시공사도 잘못을 시인했지만 정말 아찔한 경험이었죠. 설계를 어떻게 했기에 지붕을 날아가게 했냐며 놀림도 많이 받았습니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인명피해가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평양과학기술대학 역시 그에게는 잊지 못할 프로젝트다. 평양과기대는 사단법인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이 우리나라 통일부와 북한의 교육성의 승인을 받아 평양시에 세운 남북한 합작 정보과학기술대학이다. 김정식 이사장은 평양과기대 200만 평방미터 부지에 들어가는 13개 건물과 각종 시설 등 종합설계를 무료로 진행해줬다. 돈으로 환산하면 수십억원대의 작업이다. 목적이 선한데다가 친척들도 살고 있는 고향 평양에 무언가 남기고 싶어 흔쾌히 무료설계에 나섰지만 순탄치 않은 과정과 결과에 아쉬움도 남아있다.

 

“김진경 연변과기대 총장과의 인연으로 참여하게 된 프로젝트입니다. 설계를 위해 2~3번 평양에 방문을 했는데 그 와중에 북한 건축과 교수들을 참여시켜 설계 노하우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쪽 건축 설계 경험과 자재가 너무나 부족했고, 북측 교수들이 남한에 내려오는 것은 철저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결국 함께하지 못했죠. 설계에서도 남북한 공동프로젝트가 되는 것은 성사되지 못한 셈입니다. 또 북한은 시공능력이 없는데다가 남한은 지원하지 못하도록 해서 결국 짓는 것은 중국 업체가 진행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에 개교는 했지만 약속과는 달리 학생선발권을 김진경 총장에게 주지 않고 당성을 따져서 학생을 입학시킨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어 아쉬움이 좀 있습니다. 평양과기대를 통해 우수한 이공계 인력이 배출돼 현장에서 북한 최고의 기술자로 활약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처음의 믿음과 희망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10년을 쏟아 부은 인천공항 프로젝트는 그의 경력의 백미다. 국제 현상설계가 진행돼 8군데의 경쟁력 있는 설계사가 참여했고 정림건축이 포함된 조합(consortium)이 최종 선정됐다. 워낙 규모가 큰 사업이다 보니 투입된 설계사만 4개 회사의 120여명에 달했고, 운영기간에 비례해 막대한 투자금과 경비도 더욱 늘어났던 터라 설계와 시공이 같이 진행되는 방식이 도입됐다. 여러 가지로 진기록을 세웠던 셈. 정림건축은 기본설계(master plan)를 세우는 것부터 참여했는데 초기 계획이었던 7만5000평의 부지가 15만평으로 배로 늘어나는 데는 정림건축의 역할이 컸다.

 

 

“지침서를 쓰기 위해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허브공항 등을 방문해보니 공항의 게이트 개수와 규모만 중요한 게 아니라 편의시설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영국 런던의 히드로 공항(Heathrow Airport) 면세점은 해롯(Harrod`s)백화점 보다 매상이 더 높더군요. 2년을 관계기관에 주장하고 설득했는데, 결국 강동석 초대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이 오셔서야 저희 의견을 받아들여주셨죠. 세계의 젊은 건축가들이 와서 구경할 만한 공항을 만들기 위해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의 계단, 에스컬레이터, 램프까지 어느 하나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인천공항 설계하며 머리가 하얗게 새버렸습니다. 물론 건물은 흠 잡을 데 없이 잘 완성됐지만 현재 인천공항이 세계 제일의 공항이 된 것은 설계보다 서비스가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입국, 세관, 통관 등이 종합적으로 어울려야 되는데 아주 완벽히 조화됐죠. 정말 흐뭇하고 좋습니다.”

 

40여년을 정림건축에서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전국 곳곳에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운 김정식 이사장은 현재 목천문화재단을 통해 건축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일들을 진행하고 있다. 개인적인 봉사와 기부는 평생 계속해왔지만 이제는 건축계에 공헌하는 부분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어 2005년 사재를 들여 문화재단을 세웠다.

 

목천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첫 번째 공헌이 친환경 건축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건축가들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1년에 200여명의 건축가를 교육시키기 위해 그는 현재까지 3억 원에 가까운 개인기부금을 냈다. 그는 “친환경 건축은 시간이 지날수록 필수적인 일이 될 것”이라며 “현재보다는 미래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주력하는 부분은 국내 현대건축의 디지털 아카이브(archive)를 구축하는 것. 해방 직후 훌륭한 건축가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그들의 작품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 시작했다.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된 김정수 건축가의 도면이나 한국교육개발원이 소장하고 있는 김중업 건축가의 도면 등 수소문을 통해 하나하나 서두르지 않고 모으기 시작해 현재 원정수 건축가, 안영배 건축가 등의 작품까지 폭넓게 구축되고 있다.

 

“돌아가신 선배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모아 우리나라 건축의 역사를 만들어나갈 계획입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 기록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건축계 기록의 활성화에 일조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또 기독교 국제봉사단체를 통해 저개발국가에 건축 설계를 지원하는 것도 하고 있습니다. 르완다를 비롯해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한국을 역할모델(role model)로 삼고 있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르완다에 열흘 간 머물며 새마을운동을 목격했는데 감회가 새롭더군요. 그들에게 한국의 우수한 건축 설계 기술을 전수하는 것도 큰 보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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