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

2013년 8월 24일 토요일[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추산봉 2013. 8. 24. 11:32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내가 보았다.

 

사람의 눈, 환시로 본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느님 나라가 성이 있다거나 옥좌가 있다거나 계급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왠지 나에게는 낯설다. 내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인간의 육체적 조건을 뛰어넘은 세상일진데 먹거나 배설하거나 쉬거나 싸우거나 이런것들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 다만 그렇게 상상되는 것은 사람이 본 것 중 제일 장엄하고 영광스러울듯한 모습을 그린 것이리라.

예수님께서는 역시 하느님의 아들이시니 능력에 한계가 있을리 없다. 그러니 나타나엘을 보아두었듯 오늘날에도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보고 계심이 틀림없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 하기 보다는 감사하며 주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겠다.

 

주님 오늘 저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http://pds.catholic.or.kr/attbox/bbs/album/read.asp?maingroup=1&gubun=100&seq=31&table=gnAlbum&group_id=5&sub_id=2&ReadFlag=T&bbscode=&id=593&keyfield=title&key=%C3%B5%B1%B9&page=1&getSeq=31&getID=473&strmember=jpatrick&menunm=성화/이콘 해설&ctxtMember=jpatrick&ctxtAuth=R

한스 멤링의 천국의 문(최후의 심판 세 폭 제단화 오른편 날개)
  한스멤링_최후의심판세폭제단화.jpg  [200566]
<천국의 문>(부분), 1467-71년경, 한스 멤링(Hans Memling, 1435/40-1494),
‘최후의 심판 세 폭 제단화’ 오른편 날개, 242 x 180.8/90cm,
목판에 유채, 단스크 나라도웨 미술관, 폴란드
 
 
성화 해설

15세기말 중세 고딕양식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천국의 문. 문 양 옆의 기둥 위에는 천사들이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며 천국으로 들어오는 자들을 맞이하고 문 앞의 천사들은 천국으로 인도하고 있다. 선택 받은 이들은 지상 세계의 옷을 벗어버리고 천사가 입혀 주는 천상의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고 크리스탈로 된 ‘천국의 계단’을 밟고 영원한 빛의 세계로 들어간다. 천국의 문 앞에는 붉은 망토를 두른 성 베드로가 왼손에 천국의 열쇠를 들고, 천국에 들어오는 이들을 악수로 맞이하고 있다. 지상에서의 고된 삶을 뒤로 하고 영광스러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의 모습에서 온화한 평온함과 황홀감이 전해진다(박혜원 소피아).
 
[2010년 8월 22일 연중 제21주일 의정부주보 1면]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m/memling/1early3/02last1.jpg)
(원본 : http://www.wga.hu/art/m/memling/1early3/02last.jpg)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중국 도성을 건설하는 경전에 나온 내용에 九門이 있어 흥미롭습니다. ^-^

周禮 冬官考工記 

 

 

『주례』는 주나라때 작성된 예의 범절의 경전으로 알려졌으며 이 경전 내용을 따르는 것을 바람직한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주례』의 내용은 개념이 불분명하고, 또 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구절이 많았다.

수많은 『주례』 경전의 해설판이 나돌았고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나라를 세우고 도성을 건설하는 문제에 대해서 『주례』 여섯 번째 권인 「고공기(考工記)」에는 “장인이 나라 도성을 건설하는데는, 9리 사방에, 한 측면마다 3문을 내고, 종묘를 왼쪽에 사직을 오른쪽에 두고 조정은 면하고 시장은 뒤에 둔다 [匠人營國, 方九里, 旁三門, 左祖右社, 面朝後市]”는 구절이 있다. 실제로 이런 규모로 도성을 건설한 사례가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종묘를 왼쪽에, 사직단을 오른쪽에 둔다는 문구는 후대 대부분의 도성에서 그대로 준용되었다(김동욱)

 

아래 그림은 주례고공기를 바탕으로 송나라 섭숭의가 그린 주왕성

http://www.stnn.cc:82/arts/200702/t20070201_452859.html

北宋朝全民愛金石 宋徽宗重繪古器棄置《三禮圖》

北宋朝全民愛金石 宋徽宗重繪古器棄置《三禮圖》

《三禮圖》中的周王城

  北宋時期,朝廷製作禮器的樣本是宋初聶崇義的《三禮圖集注》。聶氏《三禮圖》繼承了漢唐經師對於“三禮”名物制度的認識,其特點是從文獻出發,通過經文和歷代注疏來復原上古禮器。這樣就難免出現很多望文生義的想像,以今人的眼光看來,其中荒謬可笑之處比比皆是。宋初將《三禮圖》定為朝廷禮樂製作的範本,並圖繪于國子監講堂之壁,享有權威地位,但學者範圍內的爭議一直沒有停息。《三禮圖》的問題,在傳統經學體系內是無法解決的,必須求助於新的知識背景。宋代金石學就是在這樣的背景下誕生的,因此從一開始就擔負起了更新傳統禮學的任務。

  宋代古器物學的先驅劉敞就是一位禮學專家,“朝廷每有禮樂之事,必就其家以取決焉”;他收藏先秦彝鼎數十件,經常說:“我死,子孫以此蒸嘗我。”他在《先秦古器圖》的序言中明確指出,“禮家明其制度”應是古器研究的目標之一。劉敞之後最重要的古器物學家呂大臨,是理學家程頤的弟子。他博學多識,“通六經,尤邃于《禮》,每欲掇習三代遺文舊制,令可行”。他曾“集諸家之說補《儀禮》”,又在家廟祭禮中使用古器,穿著古禮服。可見他的古器研究更是與復興古禮的實踐相結合。

  呂大臨的《考古圖》雖然沒有直接批評《三禮圖》的錯誤,但是他確立了根據器物“自名”來為古器定名的原則,實際上已經在很多方面否定了《三禮圖》,在當時的學者中產生了很大影響。

  隨著崇古之風的盛行和古器物學知識的積累,越來越多的學者開始直接對《三禮圖》提出質疑。比劉敞稍後的沈括,就已根據出土的“黃目彝”、“谷璧”、“蒲璧”等物,指出“《禮圖》亦未可為據”。受學于王安石的陸佃,撰寫了《禮象》十五卷,“以改舊圖之失,其尊爵彝舟,皆取公卿家及秘府所藏古遺物,與聶圖大異。”可見在徽宗改制之前,士大夫中間已經出現了摒棄《三禮圖》,根據古器實物來繪製新《禮圖》的嘗試。

  有了近百年古器物學傳統的支撐,眾家古器圖的導夫先路,以及士大夫階層高漲的復古熱情,才有徽宗朝規模空前的禮樂製作。大觀元年(1107),徽宗于尚書省設置議禮局,作為推行禮制改革的專門機構。w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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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숭의는 송 나라 사람으로 예학(禮學)에 밝아서 벼슬이 예기박사(禮記博士)에 이르렀고《공양춘추(公羊春秋)》를 교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