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 (DRC) 츄엔게 농촌개발

코이카 콩고사업소장 조혜승 소장님 관련 기사(펌) 경향

추산봉 2011. 2. 5. 15:18

콩고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최근 몇번 신문 국제면에 등장했지요. 좋지 않은 일로 말입니다. '슬픈 민주콩코'라는 제목의 한 기사(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202202475&code=970209)는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생존'을 염려해야 한다는 의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2006년 540여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5년간의 내전이 막을 내렸지만 정부군에 밀려난 반군들의 폭력이 계속되고 있고 특히 그 가운데 여성들이 최악의 인권 상황에 처해있다고 합니다. 이 기사는 지난 7월 올린 에티오피아 기행문에 이어서 여태 쓰지 못해 두고두고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던 민주콩고 기행문에 손을 대게 만들었습니다.

민주콩고의 수도 킨샤사에는 해외 기업들의 광고 간판이 무척 많습니다. 'AIDS 근절' '독립 50주년 축하' 간판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제품 기업들의 광고입니다. 사진 속에는 LG 간판도 눈에 띕니다. 대부분의 제품 광고판들은 민주콩고 현지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라 이름이 특이하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처럼 이 나라 이름에도 '민주'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콩고강을 경계로 서쪽 국경을 접하고 있는 '콩고공화국'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나라입니다. 민주콩고는 1997년까지 자이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내전 때문에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됐습니다. 한국 외교부 아프리카과 직원들은 민주콩고를 가야 '리얼 아프리카'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외교관들이 다들 근무하길 꺼린다고 해서 '냉탕'으로 불리는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도 생활 환경이 가장 좋지 않은 곳이랍니다. 국명에 '민주'라는 말이 붙은 것은 민주적인 선거를 한다고 해서인데요, 30대 중반의 조셉 카빌라 현 대통령을 당선케 한 2006년 대선이 사실상 첫 민주적인 선거였다는군요.

민주콩고에선 수도 킨샤사에서 사흘을 머물렀습니다. 정부 관료들을 만나는 일정이 빡빡한데다, 밤 시간엔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가 극성이고 치안도 좋지 않다고 해서 이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이 곳에 간 것은 지난 6월24일, 벨기에에서 독립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을 엿새 앞둔 날이었습니다. 자그마한 공항엔 이제 막 페인트 칠을 하고 내부 수리가 한창이었습니다. 행사가 일주일 앞인데, 아직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약동하는 활기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차로 지나가면 사방에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콩고 사람들은 다들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었습니다. 도로 위를 차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슬리퍼 차림이 대부분이고, 맨발로 걸어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머리에 무언가를 인 여성들과 빈 손으로 어슬렁거리는 남성들이 대비됩니다. "다들 어딜 저렇게 열심히 걸어갈까요?"라고 질문을 던졌다가, 일행들에게 "그런 질문에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느냐"는 면박만 당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엔 다들 똑같은 질문을 던지더군요. 서로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다들 길을 따라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은 이들이 때론 '무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에너지의 근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석양 무렵 먼지로 가득한 민주콩고의 전형적인 도로 풍경입니다. 대부분 중국인들이 개발원조로 지어준 도로라는데요. 민주콩고인들은 부실하게 지어서 도로에 하자가 많다며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차로 이동 중인 우리 일행에게 소리도 지르고 우리가 탄 차의 창문을 인상을 쓰고 막 두드리고 지나가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같이 간 일행들이 무서워 했지요. 다르게 생긴 사람들에 대해 보이는 이들의 관심은 과격하다 못해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악의를 갖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제가 먼저 씨익 웃어보이자 이들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걸 보고서였습니다. 이들은 그냥 신기했던 것입니다. 미소는 서로 무장 해제를 시켜주는 강력한 무기인가 봅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라는 영국 귀족여성이 1894년 한국을 여행하고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기행문이 떠올랐습니다. 북한강, 금강산 등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과 민초들이 살아가는 모습, 청일전쟁이 일어날 당시 왕실의 근황 등을 진지하게 쓴 이 기행문에는 조선인들이 비숍 여사의 하얀 피부를 신기하게 여겨 만져보기도 했다는 우스운 에피소드도 나옵니다. 백인을 처음 본 한국인으로선 아마도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보였겠지요. 조선의 모든 것을 호기심으로 가득 차 꼼꼼히 바라보던 비숍 여사 자신이 조선인들에게는 큰 구경거리였죠. 이 책은 한국인들이 남긴 어떠한 기록들보다 당시 시대상, 특히 민초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세히 쓴 책일 겁니다.

콩고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일에 관심이 무척 많아보였습니다. 다르게 생긴 우리 일행을 대하는 태도부터 그랬지요. 일행 중 누군가는 "오지랖이 넓다"고 비꼬았지만요. 한국국제협력단(KOICA)가 사업을 하고 있는 어느 시골 마을에 들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마을 입구가 모래바닥이어서 과연 우리가 탄 차가 들어갈 수 있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급기야 일이 터졌습니다. 2륜구동차의 바퀴가 모래에 빠져 차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런데 멀뚱히 우리 모습을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수십명 정도 몰려드는 겁니다. 차 바퀴를 모래에서 빼내기 위해 모래를 퍼나르고, 또 차를 밀고 하는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발적으로 나선 겁니다. 이 때 우리를 안내해주던 KOICA 조혜승 소장은 이 사람들을 아주 능숙하게 대하는 겁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리더가 있는 듯 했습니다. 차가 빠지자 리더가 조 소장과 무언가 얘기를 합니다. 조 소장은 리더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넵니다. "아마도 이들은 돈을 줄 것을 알고 우리를 도왔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돈을 아무에게나 주어서도 안됩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신망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지 뒷말이 없습니다."

콩고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남성 우월주의가 무척 강한 나라라고 합니다. 좀 특이한 남성 우월주의이긴 합니다. 부부가 헤어지면, 아이를 남편이 아니라 여성의 오빠가 보살핀다는군요. 남자 형제가 여성의 삶의 전반을 규율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가부장주의이긴 한데,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결혼으로 맺어진 남녀관계보다 중요하다는 뜻인 듯 했습니다.

그런 콩고에서 조혜승 소장은 특이한 존재입니다. 20대 후반의 미혼여성인 조 소장은 KOICA에서도 험지라고 하는 민주콩고 사업소에서 파견돼 홀로 주재하는 1인 소장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는 열악한 환경의 민주콩고에 자원해서 왔다고 합니다. 콩고 농업부 관료들이 주로 남성이고 현장에서 마주치는 콩고인들도 대부분 남성들이라 처음엔 많은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갔을 때 부임 4~5개월이 지난 조 소장은 이들 틈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들었던 민주콩고 원조의 현실은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꾀죄죄한 차림새로 구걸하는 아이들이 접근하면 누구든 본능적으로 피하게 마련이지요. 조혜승 소장도 지난 2월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그랬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당신은 왜 당신이 가진 것을 나누지 않나요?"라고 물어왔다고 합니다. 조 소장은 민주콩고 농업부 관리들과 함께 일을 많이 하는데, 정부 관리들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고 합니다. 원조 없이는 나라 자체가 지탱되지 않기에, 당당하게 원조를 요구하는 나라가 됐다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 일행이 만났던 이 나라 농업부 장관도 "왜 한국은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는 것입니까?"라며 더 많은 원조 사업에 뛰어들 것을 종용했습니다. 원조를 투자처럼 생각하고 민주콩고는 그 기회를 한국에 주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러한 당당함이 처음엔 당혹스러웠고 아직 잘 정리되지 않습니다.

거리에는 할 일없이 앉아 있는 남성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대개 여성들은 머리에 뭔가 이고 있든지,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빈둥거리는 모습을 잘 볼 수 없다고 합니다.



한국을 포함한 일부 선진국들이 '원조'를 자국의 에너지·자원 개발과 연계시키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원조를 받는 나라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원조 지원국들을 경쟁시키고 그들 중 자신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지원국들을 끌어 당기려 한다고 봐야 할까요.

아마도 진실은 '불쌍하다', '돕고싶다'는 시혜적 태도와 그 나라 자원 확보를 위해 원조의 손길을 건네는 음흉한 속내라는 양 극단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번 출장 후 KOICA 직원과 협력단원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개발협력 사업을 위해 뛰는 분들, 모두 힘 내시길!!